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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가진 사람이 사는 법 (정우) 소식지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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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기양 작성일21-09-10 19:46 조회1,9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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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가진 사람이

  

사는 법

 

 

 

 

 

 

 

 

 

 

 

 

 

 

 

 

 

장기양

서울시 시민기자

한국우편엽서회 총무이사

수락운수 (노원 8번 버스) 운영위원

 

절벽 가까이 나를 부르셔서 다가갔습니다.

절벽 끝에 더 가까이 오라고 하셔서 다가갔습니다.

 

그랬더니 절벽에 겨우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서야

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Robert Schuller 로버트 슐러

 

날개가 없는 우리에게 추락은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절벽은 목숨을 잃을 만큼 높거나 위험하지 않다. 어쩌면 가볍게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날 만큼의 높이일지도 모른다. 성공이 우리 인생의 끝이 아닌 것처럼, 한 번의 실패는 우리 인생에 결코 치명적이지 않다. 무엇이든 시도해 보지 않고는 우리는 우리의 가능성을 알 수 없다. 떨어지고 뛰어내리고를 반복하다 보면 우리 등 뒤의 날개는 조금씩 자라날 것이고, 하늘을 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 송이 꽃의 희망

 

할아버지(1884)가 계신 집안에 42녀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어머님이 43세에 낳은 늦둥이였다. 태어난 곳은 전라남도 화순읍내에서 4~5km떨어진 수만리 1구였고, 1~4구까지 4개의 마을이 있고 아랫마을에 국동리가 있었다. 우리 마을은 가게 하나 없던 한적한 동네였다. 우리 집 뒤뜰로 돌아가면 장독대를 지나 큰 감나무가 있었는데, 나는 매일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거나 멀리 이웃집과 동네를 내려다보곤 했다. 나는 자연 속의 소소한 행복을 좋아했었다. 가까운 학교 운동장에서 땅에 선을 그어놓고 땅따먹기를 하고, 자치기놀이, 재기차기, 저녁엔 진도리(술래잡기와 비슷한 놀이)를 하고, 논둑에서 쥐불놀이와 풀베기 등을 했다. 머리핀 따먹기와 동전던지기나 동전치기 등은 할 때마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이였다. 동네 우물가는 아낙네들이 모여 동네 소식을 나누거나 안부 인사를 하는 소통의 장소였는데, 아낙네들의 웃음소리는 듣기만 해도 즐거웠다. 우리 집엔 물지게로 물을 나를 수 있는 사내들이 많아 다른 집에 비해 물이 풍족했다.

 

어느 날, 마을 가까이 국민학교(초등학교)가 들어섰다. 여섯 살 때 학교에 가서 1학년 학생들과 어울리며 교실에까지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내게 너는 내년에 오거라하시며 웃으셨다. 그 날 이 후 선생님과 학교가 너무 좋았던 나는 눈만 뜨면 학교로 향했고,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교실도 학생 수도 적었기에 1학년과 6학년, 2학년과 5학년이 한 교실에서 수업을 했고, 선생님은 2개 반을 맡았다. 학교 앞에는 도로가 나 있었는데, 큰 재 너머에서 트럭이라도 넘어올라치면 아이들과 함께 학교 밖으로 뛰쳐나가 구경하기 바빴다. 트럭이 출발하면 차 뒤에 매달리기도 했는데, 운전기사는 서서히 달리다가 멈춰 우리를 타이르곤 했었다. 점심시간에는 강냉이 죽을 끓여 다 같이 나눠먹었고, 그릇과 수저만 챙기면 매일 따뜻한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적은 인원이었기에 더 가족같이, 형제같이 학교를 다녔던 것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나는 중학교 시험을 준비했다. 이른 시간부터 늦은 시간까지 중학교를 들어가기 위한 치열한 입시에 시달렸다. 졸업반은 남학생 15, 여학생 10명으로 총 25명이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졸업식 날 어찌된 일인지 집에 왔더니 나의 정근상과 우등상이 놓여 있었다. 졸업앨범은 졸업사진 한 장으로 만족해야했는데, 내 어릴 적 최초의 사진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에서 6학년까지 줄곧 반장만 하던 친구는 광주로 진학을 했고, 시험에 합격한 몇몇 친구들은 읍내 화순중학교로 진학을 했다. 43가구인 우리 마을(수만리1, 물촌 또는 수촌)에서는 나 혼자 중학교에 입학했고, 수만리4(중지) 1, 아랫마을 국동리는 두 명이 입학했다. 당시는 그 정도로 중학교에 간 친구가 많지 않았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나는 운동화라는 걸 처음 신어보게 되었다. 가방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보자기에 고무신을 신고 다녔었다. 아침 일찍 어머님이 깨워주시면 나는 밥을 먹고 도시락을 가방에 넣어, 교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고 학교로 향했다. 먼 거리였지만 학교를 간다는 건 아주 특별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꽃을 좋아했던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집안 뒤뜰에 한 평쯤 꽃밭을 일구었었다. 봄이면 자갈을 주어내고 봉숭아 채송화 해바라기 등의 몇 가지 꽃씨를 뿌려주었다. 여름이 지나 가을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재롱을 부리는 꽃을 볼 때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었다. 중학교 일학년 때 일기 검사를 하던 선생님이 나의 일기를 칭찬하며 일기를 낭송 한 적이 있었다.

 

꽃을 가꾸는 마음은 나의 마음을 가꾸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애국하는 길이다.”

 

한 송이 꽃을 피우는 일은 애국이라는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매일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온 정성을 기울어야 한 송이의 꽃을 피울 수 있다. 나는 지금도 꽃을 아주 좋아한다. 작은 씨앗 하나가 서서히 아름다운 꽃으로 자라나는 과정을 좋아한다. 꽃은 아무 것도 없는 빈 땅에 희망과 같다. 나의 큰형님은 중학교를 중퇴했고, 셋째 형님은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큰누나, 작은누나, 그리고 둘째형님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하겠다는 희망을 키워나갔다. 매일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1971년 여름, 광주 조선대 부속병원(1971415일 개원일)을 찾았다. 어릴 적 머리에 하얗게 피부병(버짐, 기계독)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때 아이들이 놀려대곤 했었다. 어머니가 양잿물을 끓여 머리에 발라주기도 했었지만, 나을 리가 없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아이들이 날 놀려대자, 어머니는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남광주에서 조대병원을 오가는 셔틀버스를 타고 병원을 다녔었는데, 어느 날 처음으로 택시를 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병원 앞에 도착하자, 기사아저씨가 택시비를 내라고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무료로 차를 탔었다고 하니, 기사아저씨는 셔틀버스와 택시의 구별법을 알려주고 택시비를 받지 않았다. 나는 셔틀버스와 택시가 다르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 열다섯 살 때 일이다. 몇 번의 병원치료만으로 피부병이 나을 수 있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의 신설학교인 진흥고에 입학했다. 서울 신일고를 본떠 신축한 학교였는데 6개의 반이 있었다. 막상 진학은 했지만 숙소가 없어, 광주 고모댁에 신세를 지기로 했다. 죄송한 마음에 용돈이라도 벌기 위해 전남일보(사장. 김남중) 보급소를 찾았다. 나는 140여부로 광주 대인동, 계림동, 풍향동, 중흥동을 뛰어다니며 신문을 배달했다. 한 달에 2천 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던 것 같다. 학교를 마치면 바로 보급소로 향해 신문을 배달했는데, 가장 힘들었던 건 신문대금의 수금이었다. 당시 신문대금은 350원이었는데, 지금처럼 지로용지나 자동이체가 아닌 일일이 수금을 해야 했다. 350, 300, 280, 250원 심지어 150원 할인독자까지 있어 수금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신문을 들고 배달을 나갈 때에는 5부 정도 여유를 가지고 나가, 몇 부는 리어카 튀김장수의 튀김 몇 개와 바꿔 먹고 1부는 버스요금으로 사용했다. 당시였으니깐 가능했던 것 같다.

 

가을 어느 날이었다. 신문 확장을 위해 광주고 육교 건너편 팥죽집에 들려 신문구독을 권했다. 아주머니는 신문구독은 어렵지만 배가 고플 테니 신문 한부 놓고 팥죽 한 그릇 먹고 가라고 하셨다. 그 날 이후 아주머니는 늘 신문 한부에 팥죽 한 그릇을 내주셨다. 눈치 보지 말고 오라는 아주머니의 따뜻한 마음에 나는 배달을 마치고 팥죽을 먹고 가곤 했었다. 어느 비 오는 날에는 젖은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 버스안내양 바로 뒷좌석에 앉은 적이 있었다. 안내양은 손을 내밀어 내게 10원짜리 동전 하나를 쥐어주었다. 버스기사 몰래 건네준 따뜻한 마음이었다. 신문배달일은 힘들었지만 이웃들의 배려와 나눔으로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배달 일을 마치고 공부를 하려고 하면 고모님은 늘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며 화를 내곤 하셨다. 전기세가 아닌 다른 뜻이었음을 지금은 알지만, 순진했던 나는 호롱을 사 등유를 준비해 호롱불로 공부를 하곤 했었다. 1년이 지나 고모님은 나를 더 이상 돌보지 못하겠다고 하셨고, 나는 광주에서 자취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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